시인의 말
나는 지금 빈 바가지 하나로 하늘 아래 있다 내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? 나는 잘 만져지지 않는 내 속의 공기를 버리고 그 안에 물을 가득 담는다 내 갈증의 근원인 저 물, 그렇다면 물이 내 삶의 전부인가? 나는 다시 물을 버리고 누군가의 눈빛을 그 안에 가득 담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눈빛이 내 안에서 출렁거린다 내가 흔들린다
손이여, 내안의 눈빛을 함부로 쏟아버리지 마라.
1999년 늦가을 탄현마을 서재에서 박 남 희
책정보
폐차장 근처
이곳에 있는 바퀴들은 이미 속도를 잃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롭다 나를 속박하던 이름도 광택도 이곳에는 없다 졸리워도 눈감을 수 없는 내 눈꺼풀 지금 내 눈꺼풀은 꿈꾸기 위해 있다 나는 비로소 지상의 화려한 불을 끄고 내 옆의 해바라기는 꿈같은 지하의 불을 길어 올린다 비로소 자유로운 내 오장육부 내 육체 위에 풀들이 자란다 내 육체가 키우는 풀들은 내가 꿈꾸는 공기의 질량만큼 무성하다 풀들은 말이 없다 말 없음의 풀들 위에서 풀벌레들이 운다 풀벌레들은 울면서 내가 떠나온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의 질주를 하나씩 지운다 이제 내 속의 공기는 자유롭다 그 공기 속의 내 꿈도 자유롭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저 흙들처럼 죽음은 결국 또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모처럼 맑은 햇살에게 인사한다 햇살은 나에게 세상의 어떤 무게도 짐지우지 않고 바람은 내 속에 절망하지 않는 새로운 씨앗을 심는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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