무엇이 아직도 그리 아깝고
무엇이 아직도 그리 부끄러웠으랴
헐어 버려라 헐어 버려
혼자서 중얼거리며
봄 여름 내내 땀흘려 쌓아 올린
바람의 깃발을 내리고
잠들 채비를 서두는
저 나무를 좀 보세나
가렸던 하늘을 비워
구름에게 새들에게 길을 내주고
더러는 오락가락 눈발에게도
놀이마당을 깔아주는
저 늦가을의 나무 좀 보시게나
뿐이랴
떨군 나뭇잎으로 너무 오래 붙박이로 있어서
퉁퉁 부어오른 스스로의
발등을 덮고 난 뒤에
제 이파리며 줄기 갉아먹던 벌레들의 애벌레에게까지
따뜻한 잠자리를 내어주는
더러는 제 열매 훔쳐가는 얄미운 작은 몸집의 포유류에게도
눈보라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
편안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줄 줄 아는
이 가을산의 크신 어른
오직 어지신 어른을 보시게나.
시인의 말
시인은 운명적으로 한 권의 시집을 동경한다. 비록 일생동안 형식적으로 여러 권의 권의 시집을 내기도 하지만, 한 시인에겐 그의 모든 시가 모여 한 권의 시집일 따름이다. 어쩌면 시인 자신이, 시인 자신의 삶과 그 흔적 모두가 한 권의 시집인지 모른다. 나도 한 권의 시집을 열망한다. 그러나 나는 아직 나의 시집을 마감하지 않았다. 나는 지금 시집 후반부를 쓰고 있는 중이다.그러므로 나의 이 시집 <검정염소와 더불어>는 내 시집의 중간 결산 형태라 할 수 있다. 세상에 와서 시를 만난 건 행운이었고 내 시의 독자를 만난 건 더욱 행운이었다. 시를 쓰고 읽는 마음들이 서로 이름도 모르면서 얼굴조차 짐작 못한 채 허공 중에서 만나 손을 잡을 때 꽃이 되고 풀잎이 되고 끝내 이슬이 될 것을 나는 믿는다.